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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식들이 공부하는 데는 아낌없이 지원을 하셨다. 내게는 위로 여섯 명의 형이 있는데 그 중 네 명이 서울대 졸업생이었고, 다른 형들도 명문 대학을 나왔으며, 누나들 또한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해 집과 가까운 여대를 졸업했으니 한 명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셈이다. 오직 나만 아웃사이더였다. 재수를 한 것도, 아버지께 뺨을 맞은 자식도 나 뿐이었다.
친구따라 다니다 스스로 입한한 아이
우리집 돌연변이라 할 수 있는 나는 8남 2녀중 아홉째였다. 초등학교부터 입학도 별나게 했다. 호적상 나이가 실제보다 1년 늦다보니 또래 중 나만 취학 통지서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나에게 처음으로 닥친 불가항력적인 일이었고, 학교라는 곳에 친구들을 빼앗기자 어느날 갑자기 외톨이가 되었다. 심심함을 견디다 못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등교를 해서 친구들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열흘 쯤 지나서 선생님은 출석부에 없는 이상한 학생인 나를 발견하셨고, 우리 부모님을 만나셔서 다음 날 입학하게 되었다. 1959년 5월, 친구들보다 한달 늦게(당시는 4월에 신학기가 시작 되었음) 학교에 입학해 1950년대 입학한 마지막 학생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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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부자였던 우리집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도시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신 아버지의 배려였다. 형들이 잘 해왔기에 나도 당연히 형들을 뒤따르리라고 철썩같이 믿으셨겠지만 그때부터 나는 급변하는 세상 속에 방치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짐작조차 못하셨다.
그때 나는 우리집이 무늬만 부자라고 생각했다. 시골집에선 생일날이나 먹을 수 있는 계란을 도시 친구들은 매일 도시락 위에 얹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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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원으로 국수를 사서 온가족이 먹는 것이 시골집의 식탁이라면 10원으로 라면을 사서 혼자 먹는 것이 도시의 식탁이었다. 치맛바람이 가능했던 도시의 어머니들에 비해 내 어머니는 손에서 일거리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 와중에 열 세 살인 나는 집을 떠나 공부하고, 혼자 원서 쓰고, 입학시험을 치루었다. 그러나, 도시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혼자 감당하기에 내 앞에 놓인 생은 버거웠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자퇴
급기야 우리 집안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경북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다. 후기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집안 분위기는 경북중학교가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재수를 했지만 낙방해 대구중학교에 들어갔다. 전교 8등으로 입학해 반장을 했고, 학업 성적도 괜찮은 편에다 덩치가 커서 요즘 유행어로 ‘짱’이 되었다. 그리고 콤플렉스 탓이었는지,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경북중학교 교복 입은 녀석만 만나면 패주곤 했다. 당연히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3학년 때는 무단가출 사건을 낸 후, 명문 경북고등학교 입학시험조차 떨어졌다. 급기야 눈높이를 낮추어간 대구고등학교에서 백일도 다니지 못하고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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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2학년 선배이지만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 이름을 불렀다가 집단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며칠 후 화장실에서 그 친구를 만나자, 다시 맞을까봐 엉겁결에 친구 머리를 벽돌로 치고 겁을 먹어 도망친 후 그 길로 며칠을 결석한 것이다.
일찍 취직해야만 했던 이유
"내가 친구 보기 창피해서 자퇴서 내고 왔다." 학교 연락을 받고 내려오신 아버지께서는 그때 처음으로 나의 뺨을 때리셨다. 당시 교감선생님과 아버지는 동문수학한 사이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으셨고, 정학쯤으로도 무마될 일을 자퇴로 종지부를 찍으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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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학교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보시고 말썽쟁이 친구들과 떼어 놓으려 하신 일인지도 모른다. . 더 이상 실패는 없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시골집으로 내려와야 했다. 아버지가 내리신 벌은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세숫물을 떠오고 하루 종일 붓글씨를 쓰게 하신 것이었다. 겨울 방학 때 바로 위의 형이 와서 아버지를 설득해서 서울에 데리고 가기까지 말이다.
형은 나를 검정고시 학원에 보냈는데, 그 시기는 정말 무겁고 우울한 회색빛이었다. 1년 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예비고사에도 합격했지만, 본고사에서 또 떨어졌다. 또다시 재수 낙방, 후기대에 원서를 넣으며 여기까지 떨어졌다간 서울대 출신의 형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양대 본고사 준비까지 1주일은 나의 생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간이었다. 1주일 내내 잠 잔 시간을 다 합쳐도 5시간밖에 안 될 정도라면 그때의 내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막내 동생이 제대할 즈음, 나는 입대를 해서 최전방 백암산에서 군생활을 했는 데 어찌나 춥던지 영하 15도 정도면 따뜻하다고 밖에 나와 축구를 할 정도였다. 군생활동안 내가 느낀 건 무엇이든 제 나이에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대 후 나는 이력서를 11군데 보내서 8곳으로부터 서류 합격 통지서를 받았는데, 제일 먼저 온 곳이 유한킴벌리였고, 입사 시험을 치르러 간 자리에서 유한양행 기업이미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1979년 2월 7일 입사했다. 당시 총무부 직원이 달랑 네 명이었는데, 참 좋은 날들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다시 한번 놀랄만한 일을 벌이고 말았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여사우와 몰래 숨어서 연애하다 사내결혼을 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집 전통을 깬 것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형제가 중매결혼을 했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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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변화준 결혼과 유한킴벌리
내 유년의 뜰에 내려서면 술 익는 냄새와 함께 할머니가 생각난다. 정이 많으셨던 할머니는 ‘데미안’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같은 책을 즐겨 읽으실 만큼 지적인 분이셨다. 나에게 정서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할머니께서 주신 영향이다. 아버지가 내리셨던 붓글씨를 쓰는 벌 역시 내게 참을성을 준 경험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버지 세숫물을 사랑채에 가져다 드렸던 습관이 지금도 이어져 요즘도 매일 새벽 달리기와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사회에 기여하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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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은 2년마다 한번씩 고향집에서 우리 집안 가족캠프를 운영하면서부터였다. 4대가 함께 모여 가풍을 배우는 가족캠프는 나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더 나이가 들면 시골에 폐교된 학교를 얻어 연수원을 세우고 싶다. 청소년 프로그램을 개발해 나의 문제아 행적도 얘기해 주고 그들의 고충도 귀담아 들어주며 예법도 일러주며 살고프다. 내 삶을 정지용 시인의 향수란 시처럼 아름답게 갈무리 하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한편의 만화같다는 생각이 든다. 철없던 시절에 웃음 나는 사건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내 지난 시절을 물어오면 해줄 이야기가 남들보다 많다. 물론 지난 삶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만약 인생이 다시 한번 주어진다면, 그 때는 꿈꿔왔던 건축가의 꿈을 꼭 이루어 보고 싶다.
구술정리 현명숙/가족 리포터
최섭 수석 부장은
 1979년 입사했다. 현재 아내 고진영과 아들 �재훈을 두고 있다.그의 삶의 근간을 이룬 가훈은 "거처공하고, 집사경하며, 여인층하라."이다. 즉 자신의 삶을 검소하게 하고, 일을 함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성심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그중 항상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지금까지 그가 지켜온 제1의 원칙이라고 한다.사람과 사람은 진심으로 대할 때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최섭 부장의 이야기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