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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산이문 응와 이원조의 만귀정

지안해용 2007. 7. 24. 11:01
가야산에 짙게 스민 대석학의 수행 향기
[한국의 혼 樓亭 .22] 응와 이원조의 성주 가천면 '만귀정'
10년 걸쳐 3번 옮긴 끝에 '포천구곡' 터 잡아
조정요직 두루 거치고 59세 물러나 학문 정진
당대 名儒 모여 강학·나라걱정 '역사적 명소'

포천구곡 끝자락의 폭포 곁에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는 만귀정.
포천구곡 끝자락의 폭포 곁에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는 만귀정.
아령산 외지고 좁은 터 대숲 마을 깊은 곳에(牙田欠窄竹村深), 갈곡의 시내가 앞으로 흘러 만년에야 마음에 쾌한 곳 얻었다네(葛谷前溪晩心). 삼면의 암석 간에 쌍폭포 나뉘어 흐르고(雙瀑分流三面石), 사방이 산으로 빙 두른 곳에 하나의 작은 산 숲을 끼고 있네(四山環擁一邱林). 하늘이 천년의 긴 세월동안 아끼고 비장해 둔 곳이라고 말하지 말게(莫言秘千年久), 예부터 지금껏 십년을 경영하여 얻은 곳이라네(自是經營十載今). 반드시 금강산에 가서 놀고 싶던 빚은 다 풀었고(好去金剛遊債了), 이제는 돌아와 흐르는 물 떠가는 구름 가에 한가로이 누웠다네(歸來閑臥水雲).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가야산 북쪽 포천구곡(布川九曲) 끝자락 만귀정(晩歸亭) 현판에 걸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의 '복축(卜築)'이란 시다. 이 시만 감상해 보아도 정자를 앉힌 본뜻과 그 아름다운 풍광을 잘 느껴 볼 수 있다.

깊어가는 가을 포천구곡 만귀정을 들어서면 뒤로는 우뚝 솟은 가야산 칼바위가 하늘아래 병풍을 치듯 둘러있고, 만산홍엽(萬山紅葉)과 맑디맑은 폭포의 물소리는 나그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다. 조선 후기를 불꽃처럼 살다간 응와는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인생의 후반기인 60세 무렵 경주 부윤 벼슬을 마친 후 이곳으로 들어온다. 그는 이 정자를 짓고 학문과 수양에 전력을 다했다.

#금강에 버금가는 비경에 자리한 만귀정

이곳 신계동은 본래부터 산수풍경이 좋았지만 응와가 터를 잡고 살면서 더욱 명승지가 되었다. 주자가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 들어가 무이구곡을 명명하고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지어 강학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응와는 신계동에 포천구곡을 명명하고 마지막 구곡에 정자를 지어 학문에 힘썼다.

만귀정 아래 계곡 암반에는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가 남아 있다. 일만 산의 물이 하나의 폭포로 내려온다는 누각 이름에서 '일만 가지 사물의 다른 현상이 원리는 하나'라는 만수리일(萬殊理一)의 철학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옆에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응와의 학덕을 길이길이 추모하기 위해 철제로 세운 흥학비(興學碑)가 바위 위에 꽂혀있다. 이곳은 당대의 명유들이 모여서 강학을 하고 나라를 걱정했던 역사적인 명소이기도 하다. 응와가 쓴 포천지에는 10년 정성으로 마련한 만귀정과 포천산수의 아름다움, 곳곳에 이름 지은 지명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응와가 지은 만귀정 기문에 따르면 관직 생활 50년 세월에 하루도 돌아가기를 잊은 적은 없었고 본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관직에 부임하는 곳마다 회심처가 있으면 수레를 멈추고 방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 어느 한 곳에 은둔처를 구하면 조그만 오두막을 엮어 노년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그러던 중 52세 되던 계묘년(癸卯年) 탐라로부터 돌아와 목재와 기와를 매입해 놓고 3년 후인 병오년(丙午年)에 자주(慈州)에 있으면서 예서를 잘 쓰는 조소눌(曺小訥)에게 정자의 현판을 새기게 하였다.

그리고 4년 후, 59세 때인 경술년(庚戌年)에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돌아와 청천(淸川) 수렴동(水簾洞)에 터를 잡았다가 다시 조암(祖巖)의 강 언덕으로, 또다시 아령(牙嶺)의 폭포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모두 세 번 터를 옮겨 비로소 이 포천의 골짜기에 둥지를 튼 셈이다.

정자 이름을 만귀(晩歸)라 한 것은 늦게 돌아온 것에 부끄러운 마음도 있고 10년에 걸쳐 터를 잡고 3년에 걸쳐 집을 지은 것이 늦었다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응와초상2
응와초상
만산일폭루를 끼고 포천구곡이 흐르고 있다.3
만산일폭루를 끼고 포천구곡이 흐르고 있다.


"(중략) 나는 이제 늙었다. 벼슬길에 종적을 거두고 이 고요한 곳에 몸을 쉬려한다. 성인의 경전을 안고 일반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음미하기에 충분하며, 구름과 달 속에 노닐면서 일반 사람들이 즐기지 못한 것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이제부터는 죽는 날까지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태자소사(太子少師)로 벼슬을 그만두고 영주(潁州)에 돌아가 만년을 마친 절의를 보존한 것처럼 하고, 위나라 거백옥(伯玉)이 자신의 양심에 허물을 줄이려고 노력하더라는 것을 따라, 인정의 종이 친 후에도(70세의 비유) 밤길을 다닌다는(벼슬살이 비유) 기롱(譏弄)을 면하여 바야흐로 이 정자의 이름에 저버림이 없으려고 이 내력을 기록하여 맹세한다 (…歐陽之節,寡伯玉之過,得免鍾漏夜行之譏,方爲無負於是亭,姑記之以自矢云.)" 라고 만귀정 기문에 밝히고 있다. 인생을 정리하는 만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독창적인 학설을 제시한 당대의 석학

응와의 본관은 성산이고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증조부는 돈재(遯齋) 이석문이다. 돈재는 선전관 근무 시절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구명하다가 파직된 후 낙향하여 북쪽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벼슬하러 나가지 않은 충절의 선비로 흔히 북비공(北公)으로 칭한다. 조부는 사미당(四美堂) 이민겸이다.

응와는 사미당의 둘째 아들 함청헌(涵淸軒) 형진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농서(農捿) 규진의 양자로 들어갔다. 생부는 국자 생원이었고 양부는 장령 벼슬을 하였으며 형제가 입재(立齋) 정종로의 문하에 출입할 때 금곤옥계(金昆玉季 : 금과 옥같은 형제)로 칭송받았다.

응와는 이러한 가학의 터전 위에서 10세에 이미 사서(四書)와 시·서를 통하였고 12세 때는 부형의 글을 능히 대필할 정도로 모든 문체에 통달하였다. 18세에 대과에 급제하자 부친은 "소년으로 대과에 오름은 하나의 불행"이라고 경계한 고인의 말을 거울삼아 가르침을 내리고 앞으로 10년을 기약하고 독서만 할 것을 훈시하였다. 응와는 이 가르침을 따랐고 23세 때 입재 정종로의 제자가 되었다. 25세에는 당시 석학이던 호곡(壺谷) 류범휴를 배알하였고 수정재(壽靜齋) 류정문, 정재(定齋) 류치명 등을 종유(從遊)하였다. 26세에는 전적(典籍)의 벼슬을 시작하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퇴계 학통의 정맥을 잇는 정재와 입재 학문의 요지를 얻었고 당시 학계 쟁점이었던 사단칠정론에 칠정리발설(七情理發說)을 주장, 또 하나의 논단을 제시하였다. 응와의 학맥은 대산(大山) 이상정 → 입재 정종로 → 응와 → 한주 이진상 → 면우(宇) 곽종석 → 심산(心山) 김창숙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주는 응와의 장조카이자 제자로 응와의 성리설을 진일보시켜 심즉리(心卽理)설을 확립, 당시 학계를 경악하게 한 독창적인 학자였다.

신계리에서 30분 정도 차를 달려 성주 월항면 대포리(한개마을)에 들어가면 응와의 종택과 종택 앞에 있는 북비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종택에는 응와의 6세 종손되는 이수학씨가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선대의 정신과 고택을 지켜가고 있다.

응와는 응와문집 22권, 응와속집 20권, 성경(性經) 4권, 응와잡록, 국조잡록, 난보기략, 포천지, 포천도지, 무이도지, 탐라록, 탐라지초보, 탐라관보록, 탐라계록 등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대부분 현재까지 잘 전해지고 있다.

출처 : 오류문학회
글쓴이 : 이팝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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