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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가/ 성산 이씨] `관행깨기' 앞장선 이수학씨

지안해용 2008. 9. 30. 16:00

[한국의 종가/ 성산 이씨] `관행깨기' 앞장선 이수학씨

[한국의 종가/ 성산 이씨] `관행깨기' 앞장선 이수학씨
2007/11/12 오후 5:15 | [특집]종가기행

"종손이 종가집 문지기인가"...매장대신 가족 납골묘 추진


 "어릴 때 저 진 골목(긴 골목의 경상도 纓矗?에서 동네 아들(아이들)하고 많이 놀았제.
이 한개마을의 메인 스트리트야. 저기 저 제실도 우리 놀이터였제.".

성산 이씨 응와 이원조(1798∼1871) 대감의 5대 종손인 이수학(61· 전대구남부도서관장)씨는 지난
3월 20일 43년만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낯익은 한옥들이 도란도란 10여채가 모여 앉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옥마을. 지금은 게중에 제법 깔끔하게 단장한 한옥들도 적잖지만 어린 시절만 해도
가난과 종손의 무거운 짐만 유난히 짙게 느껴졌던 곳이었다.
이사 과정에서 새삼 묵은 상처들이 소록소록 돋아났다.

200년이 넘은 묵은 한옥은 우선 종부 조정자(58)씨가 그동안 애써 아껴온 자개 장롱을 거부했다.
문턱이 낮아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막내집으로 때 이르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문화재도 가져오면 도굴꾼들이 달려들까봐 다른 곳에 보관해야한다.
도시에 살면서 4차례나 응와집 판각본 등 귀중한 문화재를 도난당했던 것이다.

한옥을 개조해 입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긴 했지만 도시 아파트에 비해 한옥이 갖고 있는
불편함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도 고향에 돌아온 감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씨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학자 집안인 응와 대감댁 종손으로 들어온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51년 만 13세 때였다. 일찍 핏줄이 끊기면서 선대 종손의 넷째 아들이었던 생부가 종가집
일을 돌보기 시작했고 결국 그 자신이 양자로 종손으로 입적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종손은 젊은 그에게 거북스러운 옷과 같았다. 종손으로 양자 가는것이 결정된 날 밤새워
우셨던 어머니 생각, 할아버지 장례식 손님을 치르느라 진 빚으로 평생을 고생한 아버지….

"음직(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덕으로 얻는 벼슬)으로 참봉 벼슬을 제수받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손님이 자그마치 2000명이었어요. 소를 두 마리나 잡았지요. 하지만 종가집 살림을 꾸리신 아버지는
그때 진 빚을 갚느라 평생을 고생하셨지요.".

젊은 종손은 집안 살림 규모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종가집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벌였던 일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19세 나이에 이곳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와서 시작한 교육공무원 생활.
63년 결혼해서 사내 아이만 넷을 낳아 기르고 공부 시키느라 보낸 힘겨웠던 세월. 한해 제사와 시제,
묘사를 합쳐 무려 33번의 제사를 소화해내야 했다.

"남들은 종가집 제사를 엉뚱한 곳에서 지낸다고 했겠지요. 하지만 제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빨래 등 집안 일을 새벽 1∼2시까지 하는 아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 없었어요.".

종가집의 허례허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그때부터 적잖은 종가의 관행을 파괴해 왔다.
"응와 종손이 그럴 수 있나"는 유림의 힐난과 집안 어른들의 꾸지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도
 "예전의 관행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69년 대구에 단독주택을 마련하면서 우선 제사를 한개마을에서 대구의 아파트로 가져와서 지냈다.

"처음 호마이카상에 제물을 놓았을 때는 조상님들에게 참으로 미안 했지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기제사와 시제, 묘사, 차사 등을 합쳐33번이나 되는 제사를 매번 성주로 다니면서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씨는 "지금은 자가용이 있어 50분 남짓이면 대구에서 달려올 수있는 곳이지만 옛날에는 그렇지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종가 관행 깨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0여년 전, 전국의 종가집이 지금도 철칙으로
지키고 있는 4대 봉사(고조부까지 지낸 제사)를 2대 봉사로 줄였다. 고민과 갈등으로 몇날을 밤잠을
세워가며 고민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제사는 살아계실 적에 같이 호흡한 조상을 추모하는 자리입니다. 2대를 넘어 증조부와 고조부로
넘어가면 그런 추억을 할 수가 없어요.형식적인 의무에 그치는 겁니다. 그리고 4대 봉사란 원래
종묘사직에서 지내던 관행입니다. 그런 관행을 굳이 사대부 집이 그대로 가져와서 현대에까지
그대로지내는 것은 조상에 보은하고 가문을 수호하는 데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불천위(조선조에서 국가의 명으로 백세 동안 사당에 모시고 제사지 내는 것을 허락한 신위) 제사를
제외하고는 "유세차…"로 시작하는 축문도 한글로 바꾸어 버렸다. 아무런 추모의 뜻도 없이 그냥
"조상을 추모하여 음식을 올리니 맛있게 드시라"는 내용을 굳이 어려운 한문으로 할 이유가
없다는 게 그 이유이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조상에 대한 보은과 효는 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보은과 효의 염을 행하는 의식은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종손이 종가집 지키는
문지기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이씨는 안동 지원 판사로 재직중인 차종손 이재근(36)씨에게도
"원껏 사회에서 날개를 펴고 난 뒤 원하는 때에 돌아오라"고 말해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처럼 적잖은 종가 관행을 파괴해온 그에게도 깰 수 없는 관행은 적잖다.
20여년 전부터 박봉의 공무원 봉급을 쪼개서 보수해온 종가의 종택. 이 고택은 조상 대대로 오랫동안 살아온 혼과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1년에 한번 음력 10월에 있는 묘사도 단 한번의 인사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뜻에서 그동안 빠짐없이 지켜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심했던 영남지역의 유림사회도 그의 이런 종손 현대화에 수긍해가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가 전국적인 유림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있는 박약회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유림사회가 그의 종손 현대화를 위한 고언에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교육공무원 생활 40년 남짓을 정리한 지난해 10월 그는 어렵게 종부에게 말을 꺼냈다.
5년 전부터 결심한 '정년 퇴직 후 귀향'을 제안한 것이다. "말이 안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이심전심인지 마누라가 '이젠 돌아가도 되겠다'고 하더라구요. 이 참에 '당신, 돌아가기로
약속한 거야'하고 굳혀 버리고 귀향을 서둘렀죠" 종부 조씨는 "그냥 한마디 한게 실수였다"면서도
그다지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이씨는 이제 종가 현대화를 위한 마지막 조치 하나를 준비하고 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이유로 고집해온 매장 대신 가족납골묘를 만드는 작업이다.

"차종손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죽고나면 우리 가족은 모두 가족 납골묘로 가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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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이씨 가문 ;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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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 이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학자 집안. 현종 때 당대 최고의 선비로 꼽혔던 응와 이원조와,
심즉리설을 내세우며 마지막 유학자 심산 김창숙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유학 계보를 형성한
성리학자 한주 이진상 등을 배출했다.

시조는 고려의 개국 공신인 이능일. 원래 신라말 성산현(현 성주군) 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수훈을 세운 뒤 태조 왕건의 딸 정순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됐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쇠락했던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인물로 평가되는 응와 이원조는 18세에 대과에
급제해 '문동이'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것이 경상도 사람을 의미하는 속칭인 문둥이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제주목사, 한성판윤 등을 역임했지만 남인이라는 이유로 당상관(조선조의 정3품 통정대부 이상
고위 관료)으로 한 품계 진급하는데 무려 23년이 걸릴만큼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제주목사 당시 선정을 펴 지금도 종손이 제주도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 초청받을 정도라고
한다. 현 종손 이수학씨는 응와 선생의 6세손이며 시조의 33세손이다.

사도세자에 대해 끝까지 충절을 지켰던 훈련원 주부 이석문 등 무관도 다수 배출했으며,
3·1운동 당시 성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이봉희 의사 등 독립유공자도 적잖다.

경북 성주 일대에 많이 살고 있으며 85년 경제기획원 인구통계조사 당시 인구는 6만4735명.
이효상 전 국회의장, 이상연 전 안기부장, 이원영 주브라질대사, 이택천 경찰청 치안감,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국민대 이규석 전총장, 건국대 이방석 전 대학원장 등이 이 가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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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마치고; 한 집안도 당파 따라 옷차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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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채의 한옥이 즐비한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는 집안에 얽힌 여러 가지 일화들이
전해 내려온다.

그중에서도 응와 종택인 북비고택과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이웃 교리댁에 얽힌 얘기는
당쟁과 종가집의 종손 잇기가 얽혀 극적인 재미를 던져주고 있다.

구한말 이 집의 장손이었던 응와 이원조 대감과 교리댁의 젊은 종손 이원규(1800∼1832)는 10촌 형제지간. 하지만 이 두 이웃은 정치적으로는 서로 전혀 다른 노선을 걸었다. 응와 대감이 남인이었던 반면, 바로 앞집은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 쪽에 속했던 것. 영남 지역 사대부 가문 다수가 남인 쪽이었지만
일부는 이렇게 노론에 속해 있는 곳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두 집안은 이웃간이었지만 이 때문에
내왕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1832년 교리댁의 젊은 종손이 33세의 나이에 후손 없이 요절하면서 일어났다. 평소 대감댁의
셋째 아들을 점찍어 두었던 종부 순천 박씨는 시신을 거두지도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이웃집을 찾았다. "셋째 구상을 대를 이을 양자로 달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평소 불편한 사이였던 응와 대감댁에서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자 종부는 대감댁 마당에 멍석을 깔고 사흘 밤낮을 그 위에 앉아 양자를 요청했다.

급기야 나중에 정경부인을 지낸 응와 대감의 부인이 나섰다. 저러다가 숨이라도 거둬 쌍초상을 치르면 어떻게 하겠느냐 며 집안 어른들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아이의 어머니가 나서는 바에야 어른들도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결국 멍석 시위 사흘째 응와 대감댁은 종부의 정성을 감안해 늦둥이 구상을 양자로 내주었다고 한다. 이 늦둥이 양자가 나중에 홍문관 교리 벼슬을 지내 이 집안이 교리댁이라는 택호로 불리고 있으니
정적의 집안에서 보배를 얻은 셈이 됐다고 한다.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구상은 그러나 말 못할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집안 어른과 일가친척의 호칭부터 달라 한동안 고생을 했다고한다. 노론과 남인 집안은 옷고름 매는 법과 집안 친척 부르는 법 등 복색과 호칭이 전혀 달라 바로 이웃에 있는 生父母에게 문안을 할 때는 대문을 나서자마자 복색을 남인식으로 바꾼 뒤 방문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아직도 짙게 남아있는 현대에도 결코 지난 일같지 않은 일화이다.
 
* 경북 성주=최유식 주간부기자 /finder@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