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스크랩] 남귤북지(南橘北枳)의 현장 성주 한개마을의 교리댁

지안해용 2015. 11. 2. 14:00

 

제주 목사를 지낸 응와 이원조 초상화 ,공은 말년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주 목사 재임 시 제주에서 귤나무 3그루를 가져와 3형제에게 각기 선물했는데 2그루는 죽고 막내 아들 것만 살았다. 그러나 현재의 것은 탱자나무이다. 남귤북지의 현상일까

탱자나무 수관부

노랗게 익은 탱자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교리댁 입구

교리댁 사랑해

성산인 응와 이원조선생과 성주 한개마을의 탱자나무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대포(大浦)는 한개마을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600여 년 전 세종 때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하여 개척한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이다.

17세기 이후 과거합격자가 많이 나왔으며, 충절과 지조, 높은 학문, 독립운동가 등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되었다. 현재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9채와 재실 6채를 포함한 75채의 집들이 있으며,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된 전통가옥이다.

또한 각 집을 둘러싸고 있는 흙 담장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마을의 운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2007년 마을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제25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니 문신(文臣)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와 공의 조카이자 조선성리학의 6대가의 한 사람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이다.

특히, 응와는 약관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시대가 노론 및 안동 김씨가 득세할 때이자 당파가 남인이어서 초년에 등과해도 그의 출세 길이 매우 더디었다. 1841년(헌종 7년), 50세로 제주목사가 되었다. 헌종으로부터 유서통(諭書筒)을 하사받아 제주도 정사의 전권을 위임받고, 선참후계(先斬後啓)의 권한까지 부여되었다.

전라감사에게 구호양곡을 요구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귀양 와 있던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주민들의 교학(敎學)을 당부, 동계 정온(桐溪 鄭蘊)의 사당을 세워 그 곁에 서당을 세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이해진 군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유사시에 대비하는 한편 못 쓰게 된 목장을 논밭으로 만들어 식량생산을 늘리고 어른들에게 경로잔치를 열어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며 남편을 독살한 간부를 기지로써 잡았다.

임기2년 4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귤나무 3그루를 가져와 3명의 아들에게 각기 한 그루씩 선물로 주었다. 그 중에서 2그루는 죽고 셋째 아들 구상(龜相)이 심은 것이 한개마을 교리댁에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귤나무가 아니고 탱자나무다. 문득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중국의 한 고사가 생각난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안영(晏嬰)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나라 영왕(靈王)이 사신으로 방문한 그의 앞에 도둑질을 하다 잡힌 죄인을 불러 놓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죄인은 ‘제나라 사람’이라고 답했다.

영왕은 안영을 바라보며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하느냐’며 비웃듯 말했다. 그러자 안영은 ‘강남 쪽의 귤을 강북 쪽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은 환경 때문입니다. 저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도둑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을 보면 초나라의 환경이 좋지 않은 때문인가 봅니다’고 받아쳤다. 이에 영왕(靈王)은 안영(晏嬰)의 지혜로움에 탄복하고, 크게 잔치를 열어 환대했다고 한다. ”

사람은 물론 나무도 환경에 크게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고사(古事)일 뿐 실제 그렇다고는 보기 어렵다. 두 나무는 같은 운향과 식물이기는 하지만 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DNA가 달라 질 수 없다. 다만 귤나무에 크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접을 붙이는 대목(臺木)을 탱자나무를 쓰는데 이런 연유로 제주와는 달리 겨울이 추은 성주에서는 지상부의 귤나무는 죽고 지하부의 대목에서 싹이 자란 것이 아닌가 한다.

응와 이원조 선생은 제주목사 재임 중 학문진흥에도 힘썼지만 <탐라지 초본>과 <탐라록> 등을 저술하여 19세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역사, 민속, 풍물 등을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2007년 <탐라지 초본>은 제주교육관박물관에 의해 국역되었으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탐라록>은 아직 국역이 되지 못했다며 응와의 종손 이수학씨가 아쉬워하고 있다.

출처 : 나무이야기,꽃이야기
글쓴이 : 이정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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